좋은 어른의 조건

 



네트워크및보안연구실 김순재

 

어른은 하기 싫은 일도 해야만 할 때가 있다.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연구실 잡일, 외부 출장, 직장 회식 참석, 예비군훈련, 결혼식 가기 등. 하기 싫은 일을 시키기만 할 뿐인가? 정작 하고 싶은 일은 못 하게 할 때도 많다. 하루는 24시간뿐인데 하고 싶은 일은 못 하게 하고 하기 싫은 일은 강제로 시킨다니. 이렇게 부당한 일도 없을 것이다. 어른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벌을 받아야만 하는 걸까? 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시키는 걸까? 어디에 적혀 있나? 난 거기에 동의한 적 없는데.

이러한 문제 제기에 도달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잠자코 시키는 일을 한다. 사람에 따라 의도된 태만이나 은근한 방해 공작을 섞을 수도 있겠으나 보통은 짜증을 삼키며 주어진 일을 수행한다. 틈만 나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사회 부적응자 소리 듣기 딱 좋다. 어린애같이 굴지 말라는 소리는 덤이다. 이렇게 보면 어른의 조건은 하기 싫은 일도 군말 없이 해내는 능력인 것으로 보인다.

그저 그런 어른 말고, 좋은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 그 사람 좋은 어른이지. 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내가 처한 부당함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건 좋은 어른답지 못하다. 하루는 24시간뿐이다. 한정된 자원만 가진 사람이 권위 없는 명령에 복종하여 시간을 써버린다는 것. 그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진짜’ 정당성에 응하지 말라는 명령에 대한 암묵적 동의이다. ? 시간은 항상 모자라니까. 불필요하게 긴 보고서 양식에 한 마디도 항의하지 않는 건 알아서 연구를 일찍 마무리하고 보고서 쓰는 시간을 늘리겠다는 뜻이다. 제출 기한에 맞춰야 하니까. 정당성을 올바르게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좋은 어른이 아닌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좋은 어른이라면 모든 부당함에 맞서 싸워야 할까? 내 생각엔 일단은 참아 보는 게 좋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듯, 싸움은 이 문제와는 상관이 없었던 제3자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다. 때론 그 어쩔 수 없는 피해가 새로운 부당함이 될 수도 있다. 얘들은 왜 싸워서 가만히 있는 내가 피해를 보아야 하나? 부당하다. 그러므로 일단은 너그럽게 참아본다. 그러다 어떤 부당함의 임계점을 넘으면 터뜨리는 것이다. 다 때려 부순다는 마음가짐으로. 정확히는 싸움이 만들어내는 어쩔 수 없는 부당함까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부당할 때. 부당함의 임계점을 넘어 싸울 때가 됐다면 그때에는 너그러운 마음은 깨끗이 잊는 것이 좋다. 그런 어설픔으로 싸웠다간 부당함은 시정되지 않고 싸움의 상처만 남을 것이다.

폭발의 순간에 너그러운 마음을 단호히 잊기 위해선 꾸준한 실천이 필요하다. 나 자신은 부당함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떳떳함을 가질 만한 실천. 누군가가 만들어 낸 부당함을 심판하는 순간에 너그러운 마음이 새어 나오는 이유는 그 누군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보통 역지사지 기능을 갖고 있다. 원하지 않을 때도 기능한다. 취한 상태로 운전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음주 운전으로 적발된 연예인을 쉽게 비판하기 어렵다. 연구실 땡땡이를 쳐본 적 있는 사람은 연구는 안 하고 잠만 자는 사람에게 뭐라고 하기 어렵다. 이것이 어떤 잘못을 비판할 자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부당함을 단호하게 심판하는 순간에는 떳떳함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면 너그러운 마음을 잊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때려 부술 마음가짐을 제대로 가지려면 이런 실천도 요구된다.

부당함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든, 어쨌거나 모든 어른은 하기 싫은 일에 둘러싸여 산다. 하기 싫은 일에 대해 불평하면서 정작 그 하기 싫은 일을 준 원인에는 언제나 침묵하고, 자기 자신도 하기 싫은 일을 무감각하게 남에게 떠넘긴다. 이 경우가 가장 흔하다.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떠넘기면서도, 본인이 겪은 부당함에는 참지 않고 폭발했던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사회 부적응자라는 비난을 듣고 떠났다. 하기 싫은 일을 떠넘기지도 않고, 때려 부술 용기도 전혀 없는 사람들은? 조만간 과로로 쓰러질 것이다.

이 모든 경우를 피해 좋은 어른이 되려면 이 조건을 갖추면 된다. 때려 부술 마음가짐 가지기. 그러려면 스스로는 그 부당함을 만들어내지 않아 왔다는 실천의 경험이 필요하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추가로 맛집 많이 알기, 길가에 가래침 뱉지 않기도 좋은 어른이라면 가져야 할 법한 특성이다. 좋은 어른 안 한대도 말리진 않겠다.